‘자귀 짚다’라는 말이 있다. 짐승을 잡기 위해 그 발자국을 따라간다는 뜻이다. 나라는 짐승은 무슨 먹이를 찾아 어떤 발로, 어떻게 걷고 있을까. 어떤 길을 다니고, 어떤 풀의 냄새를 맡고, 어디서 물을 먹으며, 가끔씩은 멀리 보기도 할까. 실제로 원고를 읽어나가니 길고, 암담하고, 눈물나고, 때로 눈앞이 환해지기도 하는 여행이 시작된 듯했다. 기분이 이상했다. 나 스스로 내 발자국을 쫓는 일은 낯익기도, 낯설기도 했다. 내 안에서 이미 체화된 어떤 사실들이 꿈틀거리며 내 몸안에 자리잡기 시작한 순간이 보였고,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어떤 순간들도 있었다. 어떤 글을 쓰던 무렵 일어났던 어떤 일들이 떠오르기도 했고, 마땅히 생각나야 하는 어떤 사실들은 아무리 애써도 기억나지 않았다. 내가 찍은 발자국 사이로 내가 잃어버린 것들도 보였다. 기억이란 상실의 역사이기도 했다. 뉴욕은 내가 오래 살던 곳이다. 그곳에서 내 젊은 시절의 대부분을 보냈고, 지금 갖고 있는 가치관의 대부분이 형성되었다. 그동안 나는 내가 누구보다 뉴욕을 사랑한다고, 나에게 뉴욕은 특별하다고 생각해왔다. 이것이 매우 특별한 일은 아닐 것이다. 누군가에게 용산이 특별하고 누군가에게 베를린이 특별한 것처럼, 나에겐 뉴욕이 특별했다. 여기 그려진 뉴욕은 나만의 특별한 뉴욕이다. 그 안에서 내가 본 것, 내가 느낀 것, 내가 생각한 것은 모두 뉴욕이란 도시의 일부이고, 나만의 사적인 뉴욕이다. 사적이라 해도 부끄러워하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모든 일은 지독히 사적인 것에서 비롯하니까.
실제로 이 책은 두렵고 떨리는 첫 경험처럼 느껴졌다. 내가 쓰는 첫번째 책 같았다. 방대한 글의 교정 작업은 여전히 암담했지만 때로 즐거웠다. 이미 쓴 글을 삭제하고 다듬는 일이었지만 내가 지금 글을 쓰고 있는 건가 하는 순간도 있었다. 나의 생각과 내가 사랑하는 것들의 맥락이 느껴졌고 많은 것들이 말이 되었다. 아, 그래서 그랬지…… 발자국을 따라가다보니 그 짐승을 잡을 수 있을 것 같다. 발자국을 되짚는 일은 그만두고 이제 앞으로 함께 걸어나가고 싶다.
이 책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앞서 원고 뭉치를 가져다준 그 누군가의 덕분이다. 일도 일이지만 그 친구는 나의‘ 사적인’ 친구다. 우리는 처음 만날 때부터‘ 사적임’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새록새록 새로운 비밀들을 공유하고, 새록새록 비밀스럽게 아껴왔다. 내가 발 디딜 힘도 없을 때 곁에 머물러준 친구다.
그동안 많은 것을 겪은 느낌이다. 오래 왔지만, 그럼에도 이 책이 미약하나마 시작이 되었으면 한다. 가장 사적인 것이 가장 멀리 갈 수 있다는 믿음으로, 함께, 한 발자국. 또 한 발자국.
이 책이 마크 스트랜드의 책이라는 건 첫째, 이런 의미다. 스트랜드는 시인이고 이 책은 시인의 산문이라는 것. 1934년 캐나다에서 태어난 마크 스트랜드는 미국의 네 번째 계관 시인을 지냈고, 1999년에는 시집 <눈보라 한 조각 Blizzard of One>으로 퓰리처상을 받았다. ... 마크 스트랜드의 시는 평이하고 절제된 언어와 가슴 아프면서도 기이한 초현실적인 이미지로 알려져 있다. 주의를 기울여 이 책을 읽었다면 눈치챘겠지만 그의 시는 호퍼의 그림과 종종 비교되기도 한다.
둘째로 이 책은 흔히 볼 수 있는 화가의 모노그래프가 아닌, 스트랜드라는 시인의 특별한 시각을 담은 책이란 점이다. 호퍼는 불공평하다고 생각될 정도로 자주 '미국적 사실주의 작가'라고 일컬어진다. ... 호퍼는 보통의 평보다 좀 더 보편적이면서도 복잡한 작가이고, 스트랜드는 그걸 누구보다 정밀하게 읽어내고 있다. 난 과학보다 정확한 것이 시인의 언어라고 믿는 편인데, 스트랜드는 이 책에서 놀라운, 때로는 따라잡기 힘들 정도의 정교한 관찰력을 보여준다. - 박상미 (옮긴이)
나는 언젠가 “마음 속에 정물이 있다”고 시작하는 짧은 에세이를 쓴 적이 있다. 어딘가에 무언가를 놓을 때, 배열할 때 나를 쓸고 지나가는 어떤 심상 같은 것에 대한 글이었는데, 이 책은 시작부터 그런 미학적 순간의 가능성을 알린다. “음식을 구하고 구한 음식을 먹기까지 그 사이에 시간이 있다. 음식이 어딘가에 놓이는 시간이다.” 고대부터 지금까지 정물이 만들어지는 순간이다. 그 일상의 공간 속에서 문명사를 통해 우리에게 중요한 메시지와 심상을 전해 준 정물의 미학이 스미는 것이다. 대븐포트는 『상상력의 지리학』이라는 책에서 “인간은 처음에 사냥꾼이었고, 그리고 예술가였다”라고 했다. 사냥꾼의 일(음식을 구하는 일)과 음식을 먹는 일 사이, 내가 먹을 음식을 어떤 미학적 심상과 함께 재현하고 싶어질 때 인간은 예술가가 된다.
왜 갑자기 취향이냐고 말들이 많았다. 나도 그랬다. 노래 가사처럼 '달과 유월과 페리스 휠'만 생각하고 싶었지 취향 따윈 덮어두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아무리 움직여봤자 지도 위를 벗어날 수 없는 것처럼, 이 세상에 태어나 소비를 하고 사는 이상 취향의 문제를 비껴갈 수는 없었다. 삶의 미세한 결들 속에 숨어 있는, 이 매력적이고도 거추장스러운 문제를 한 번쯤은 진지하게 생각해줄 필요가 있었다. 게다가 난 얼토당토않게 패션 일을 하지 않았나. 갑작스레 본 것도, 들은 것도, 느낀 것도 너무 많았다. 엉뚱하게 보낸 하루를 마감하는 일기처럼, 특이한 영화를 본 감상문처럼 나름대로 정리가 필요하기도 했다. ('책머리에_'나쁜 취향? 취향에 대해 말하기'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