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들께 바라는 것은, 이스라엘 교육 시스템은 다양하기 때문헤 한 일면만 보고 이렇다고 단정 짓지 말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이를테면 취학 전 유아에게 부지런히 읽기와 쓰기 등 글을 가르치는 유아원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유아원도 있는 만큼 다양한 교육 시스템을 열어놓고 모든 어린이가 적절한 곳에서 자기 개발을 해 나갈 수 있는 곳이 이스라엘입니다.
십계명의 하지 말라, 하라는 말씀을 반대로 읽어 보세요. 맘에 드십니까?
“하지 말라”라는 것을 하고, “하라”라는 명령을 하지 않을 때 어떤 세상이 예측되나요?
모든 성경 중에서 십계명은 특별하고 고유한 지위를 받았습니다. 애굽의 노예였던 옛 사람이 은혜로 구원받아 된 새 사람에게 선포(declare)하신 말씀이기에 특별하고 자신의 친필로 새겨 써서 주신 커리큘럼이니 고유한 것이요, “지키라 명령하시고”(신4:13요약),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눅10:28요약)고 주셨으니 십계명이야말로 인간의 행복과 안전을 지켜주는 생명의 법입니다.
이러한 십계명을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라고 명령하셨으니 기독교인에게는 필수 전공교과입니다. 선택이나 교양강좌는 학생들이 임의로 정하지만 전공필수를 이수해야 졸업 한다는 사실, 아시지요? 기독교의 조직신학과 삶의 기본원리들이 십계명에 다 들어 있습니다. 십계명에 하나님과 이웃이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 어떤 사랑과 은혜를 받아 살고 있으며 이웃들에게 빚진 것이 무엇인지 안다면, 인류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이웃에게 어떤 사람으로 책임 있게 살아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입니다.
십계명을 대중화 하려는 의도에서 시작한 이 책은 십계명 총서 39권 중에 첫 번째 책입니다. 이 책들은 끊임없이 우리를 계명 앞에 세워서 양심을 일깨우고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삶을 도울 것입니다.
기독교인이 안고 있는 가장 고질적인 문제는 그렇게 성경을 읽고 달달 외우고 배우는데 삶으로 가져가지 못하는 점이 아닐까요? 이것은 제 자신을 두고 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동안 우리가 복음전파에는 열정적인데 삶을 가르치는 십계명에 대한 인식은 미약했습니다. 우리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본받는 것이 무엇인지, 십계명에 다 있는데 이것을 구체적으로 제시해 주지 못했을 뿐 더러 공 예배에서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을 낭독하면서 십계명선포는 생략했습니다. 십계명은 하나님의 선포로 (declare) 세상에 왔음에도 말입니다(출20:1, 34:5, 신4:13참고). 우리도 교회와 가정에서 십계명을 선포해야 합니다.
왜, 교회가 세상에 존재할까요? 우리는 그동안 “교회로 오라”고 외쳤습니다. 와서 받으라고 했고 교회로 데려오는 일에 열심이었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마치 음식점 안내원이나 대리운전 같은 수동적인 역할을 할 것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 각자, 한 사람, 한 사람이 교회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 모두가 세상에 보냄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 사람은 “사는 그 자리”에서 주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방법으로 가야 할까요? 사랑의 십계명으로 보냄을 받는 것입니다. 이 사랑은 명령에 의한 것이므로 우리에게는 의무(Arbeit)이며 직업입니다. 하나님 은혜를 헛되게 방전시킬 게 아니라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충전시키는 십계명으로 정비해야합니다. 십계명이 우리 믿음을 확인하고 약속하신 축복을 소망하며 사랑으로 응답하기 때문입니다.
십계명의 총체적인 주제가 “사랑”입니다(마22:37~40참고). 십계명의 끝 부분은 “네 이웃”이라는 단어가 네 차례나 나옵니다. 십계명은 이웃의, 이웃을 위한, 이웃을 향하여, 이웃에게 보내는 윤리(missio- ethics) 이며 신학(missio- theology)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동안 하나님과 이웃을 분리시켜 왔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교회에 나가야만 만나는 분으로 인식했습니다. 신학자 리쾨르(P.Ricoeur)가 6계명을 해석할 때 제안 했듯이 이웃을 하나님으로 보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골자도 적극적으로 세상으로 가서 사랑하라! 는 명령입니다(마28:19,20참고). 그러니 십계명은 그리스도인으로 소명(calling) 받은 신자의 본업(vocation)이요, 하나님과 이웃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가에 대한 교본입니다. 십계명은 정죄의 수단이 아니라 우리를 하나님의 면전에 세워서 뿌리 깊은 죄를 인식하고 용서와 은혜의 깊이를 알게 합니다.
우리를 선한 사람으로 변화시킨다는 믿음을 가지고 전 세대에게 다양한 방법으로 접근하고자 이 책은 다음과 같은 네 가지 논지에 기초했습니다.
1. 거룩한 사랑
이 논지는 “어느 계명이 가장 크니이까?”라는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에서 찾았습니다. “첫째는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 둘째는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하라”고 하시므로 모든 성경과 기독교 윤리의 핵심이 십계명에 있음을 명시하셨습니다. 따라서 성경학자들은 십계명을 전통적으로 사랑의 두 계명이라고 요약합니다.
그런데 왜, 사랑의 문제에 하나님을 앞에 둘까요? 왜 사람과 다른 사람 간의 윤리문제에 하나님의 사랑이
십계명은 이스라엘 민족에 국한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무시하고 현재는 유대교, 이슬람교, 기독교의 고유한 가치가 되었고 세상은 십계명의 윤리적 토대위에 세워져 있으며 십계명의 일부는 세계의 보편적 가치가 되어 있습니다. 세상을 올바로 보는 방식을 구체화 시켜 주는 십계명을 세상에 사는 날 동안 배우고 또 배우라고 하셨습니다.(신6:2~9참고).
“네가 호렙 산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섰던 날에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기를 나에게 백성을 모으라 내가 그들에게 내 말을 들려주어 그들이 세상에 사는 날 동안 나를 경외함을 배우게 하며 그 자녀에게 가르치게 하리라 하시매” 신4:10.
개입되어야 할까요? 이 점은 세상이 말하는 사랑의 보편개념과 다른 차원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성(聖)과 속(俗)을 구분하는 거룩한 사랑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앞에 둔 기독교의 사랑은 그래서 거룩한 사랑입니다. Let’s be holy, in Jesus!
2. 생명을 살리는 축복의 계명
이 논지는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good work)을 하여야 영생(eternal life)을 얻으리이까?”(마19:16) 라는 질문에 따른 예수님의 담론에서입니다. “계명을 지켜야 한다.”는 선언과 “가난한 자에게 재물을 주고 나를 좇으라, 그러면 하늘의 보화가 있을 것이다.” 라는 두 명제는 십계명이 선한 일이요, 이웃을 살리는 축복으로 연결됩니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눅10:28요약. 십계명은 이처럼 생명을 살리는 메타윤리(meta- ethics)요, 율법을 온전케 하신 점에서 도덕적인 초자아입니다. 생명의 기원이 하나님의 말에 순종하여 창조되었듯이 십계명은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함으로 생명의 법이 될 수 있습니다. 십계명은 사람을 살리는 선한 윤리로서 그 상급은 축복입니다.
3. 예수의 새 계명
예수께서는 사람들이 왜곡시킨 십계명을 바로 잡으셨습니다.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마5:21,22참고).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마5:27, 28).
십계명을 가볍게 생각하지 말라는 주님의 이 경고를 은혜시대를 사는 사람들은 받아 들여야 합니다. 십계명은 악이 뭔지 알게 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의지하게 합니다.
4. 예수의 빛
이 논지는 “양심의 가책을 받아”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요8:11)에서입니다. 예수께서 그녀를 정죄하지 않은 것은 그 자리에 증인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죄를 정죄하고 고발하는 허다한 증인들을 자발적으로 떠나게 하셨습니다. 십계명의 최종적인 목표는 이처럼 범법자가 회심하고 돌아오는 길을 터주는 것입니다. 십계명이 처벌이나 정죄문서가 아니라 죄를 깨닫고 돌이키는데 있다면 죄책의 치료와 회복도 이 안에 있을 것입니다. 십계명은 회심을 통해 완고한 심령을 부드럽게 하고 치료하는 토라(=예수)의 빛입니다(홋4:3. 출15:26참고).
십계명을 대중화 하고자 “생활 속 십계명”에 관심을 두고 연구하고 가르쳐 온지 어언 22년이 됩니다. 그동안 사역현장이던 장로교 합동교단 소속의 장충교회, 왕십리교회, 왕성교회, 성복교회와 제가 사역한 총신대에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법을 성경의 원리에서 배웠다면 이화여대 신대원에서는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에 관심을 갖게 했습니다. 대학시절의 은사이신 숙명여대 음대의 임명애교수님, 총신대신대원 총장을 지내신 김의원교수님, 감신대의 김득중교수님, 서울신대의 최종진교수님, 이 분들은 지금은 현장에서 은퇴하셨으나 제가 이스리엘에서 돌아와 십계명사역을 처음 시작할 때 격려와 추천의 글을 아낌없이 주셨습니다. 이 글들을 소중히 간직하였다가 이번에 책에 실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저의 십계명 논문지도 교수이셨던 이화여대의 양명수교수님은 십계명교과의 정확한 방향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c3tv인터넷 주석과 여러 성경번역자들을 비롯해서 십계명을 연구한 저술가들의 저서는 큰 도움이 되고 있으며 감사드립니다.
이 책은 그동안 제가 총신대 사회교육원과 여러 현장에서 가르쳐 온 강의안의 일부이며, 본인의 논문 “폴 리쾨르의 십계명윤리연구” 2007. 이화여대 신학대학원. TH. M학위 논문의 일부를 쉽게 풀어 쓴 글임을 밝혀둡니다. 2021. 1월 이영희 - 머리말
유대인들은 밥상을 통해 가족 공동체를 든든하게 세워왔습니다. 나는 이스라엘에서 2년여간 유대인들과 한솥밥을 먹으면서 그들의 밥상 문화를 참 부러워했습니다. 손수 음식을 준비하는 어머니의 정성과 가족이 한자리에 모여 나누는 이야기꽃, 새로운 반찬이 하나씩 올려질 때마다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와 찬양...
밥상 앞에서 자녀들이 부모님의 노고에 대하여 감사드리고, 아버지가 아이들을 축복하는 모습을 볼 때면 나는 즐거웠습니다. 그 밥상에는 예절이 있고 가정교육이 있고 예배가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밥상은 가정 예절을 배우는 유쾌한 교육의 장소이며, 어떤 잘못을 고백해도 다 용서 받는 화해의 장소이며, 영혼과 육체를 보신하는 성소의 떡상입니다.
밥상머리에서 부모는 자녀에게 영적인 자양분을 공급해줍니다. 밥 한번 같이 먹기 힘든 세상이라고 푸념만 할 것이 아니라 크리스천 부모들이 나서서 아이들을 밥상머리로 불러들였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