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녘에 꾸었던 꿈, 낯선 사람이 던지고 간 말 한마디. 무심코 펼쳐든 신문에서 발견한 글귀, 불쑥 튀어나온 먼 기억의 한 조각들까지 모두 계시처럼 느껴지는 때가 있다. 바로 그런 순간들이, 내가 소설을 쓸 때 가장 사랑하는 순간들이다. 여느 때와 같은 일상이지만 전혀 새로운 감각으로 부딪쳐오는 숱한 의문들, 짧고 강렬한 각성, 깊숙이 찌르는 느낌 속에서 나는 일종의 자유를 느낀다.
이 소설은 3년 전에 초를 잡아놓고 서랍 속에 넣어뒀다가, 지난해 2월에 꺼내 쓰기 시작했다. 소설과 함께 열두 달을 순회하는 동안 나에게 시간은 다른 속력으로 흘렀다. 언제나 그랬듯이, 내 몸에 머물렀던 소설은 가장 먼저 내 존재를 변화시킨다. 눈과 귀를 바꾸고, 당신을 사랑하는 방법을 바꾸고, 아직 걸어보지 못했던 곳으로 내 영혼을 말없이 옮겨다 놓는다.
직접 이름을 밝히기보다는 마음으로 인사드려야 할, 많은 영감과 도움을 주었던 분들에게 감사한다. 책을 만드느라 애써주신 문학과지성사의 여러분께도 감사드린다. 이렇게 쓸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살아 있다는 것에 나는 감사한다.
2002년 1월
韓江
첫 창작집을 낸 뒤 칠 년여 동안, 그사이 첫 장편소설을 삼 년간 쓰기도 하며, 제법 긴 간격을 두고 써갔던 단편들이다. 첫 단편집을 묶고 나면 그것이 매듭이 되어 다음 단편집이 변화한다고들 말한다. 이 소설들을 다시 읽으며 그 말을 실감했다. 이 책에서, 나는 나아가고 있다. 조금씩 몸을 뒤채이며 달팽이처럼 전진하고 있다, 그가 낼 수 있는 최대치 속도와 힘으로.
소설들의 배열을 바꾸었고, 몇몇 표현들을 손보았다. 이 책의 개정판을, 첫 소설집과 세번째 소설집의 사이에 나란히 놓아둘 수 있도록 도와주신 모든 분들께 머리 숙여 감사드린다. 표지에 사진을 싣게 해주신 이정진 작가님께도 감사드린다.
2018년 가을, 서울에서
이 소설들은 원고 청탁을 받지 않고 썼다. 혼자서 써놓고는 서랍에 넣어두고 생각날 때마다 열어 조금씩 고쳤다. 그렇게 한 편 쓸 때마다 여러 달 시간을 들여서인지, 책 전체에 나 자신이 묻어나는 느낌이다. 물론 개인적인 경험들을 직접 옮겨놓은 것은 아니지만, 돌이킬 수 없이 배어든 정서들이 있다. 두텁디두텁게. 간절하게. 때로는 이상하리만치 선명하게. 찌르듯 고통을 주며.
알고 있다. 이 소설들을 썼던 십이 년의 시간은 이제 다시 돌아올 수 없고, 이 모든 문장들을 적어가고 있었던 그토록 생생한 나 자신도 다시 만날 수 없다. 그 사실이 상실로 느껴져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결코 작별의 말이 아니어야 하고, 나는 계속 쓰면서 살아가고 싶은 사람이니까.
가만히 하나의 매듭을 지어주신 문학과지성사의 여러분께, 지켜보아주셔서 감사하다는 인사를 드린다.
표지에 사진을 싣게 해주신 이정진 작가님께 감사드린다.
2018년 가을, 눈부시게 밝은 오후에
[작가의 말] 중에서
어두워지기 전에, 하얗게 얼어붙은 강을 전철로 건넜다. 강의 가운데는 얼지 않아서, 얼음 가장자리에 물살이 퍼렇게 빛났다. 이제 정말 이 소설이 내 손을 떠난다는 사실이 실감되었다.
네 번의 겨울을 이 소설과 함께 보냈다. 바람과 얼음, 붉게 튼 주먹의 계절. 이 소설 때문에, 여름에도 몸 여기저기 살얼음이 박힌 느낌이었다. 때로 이 소설을 내려놓고 서성였던 시간, 뒤척였던 시간, 어떻게든 부숴야 할 것을 부수며 나아가려던 시간 들을 이제는 돌아보지 말아야겠다.
1993년 10월부터 1994년 10월까지 약 일 년 동안 이 단편들을 썼다. 만 스물세 살에서 스물네 살에, 워낙 오래전에 쓴 글들이라서, 2007년에 개정판을 내며 한번 손보았음에도 불구하고 몇몇 문장들과 크고 작은 장면들을 고치고 다듬었다.
문학과지성사의 여러분께, 이십여 년 동안의 인연에 감사드린다. 표지에 작품을 싣도록 허락해주신 이정진 작가님께도 감사 인사를 드린다.
2018년 가을, 바람이 서늘해진 서울에서
한 강
이 책의 개정판이 출간된다는 소식을 듣고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그해 가을과 겨울 밤들의 감각이었다. 몸이 회복된다면 쓰고 싶은 소설들의 목록을 (희망 없이) 마음속으로 굴리던 밤들. 그때 『채식주의자』는 이미 3부로 구성된 장편소설이었고, 지금과 같거나 거의 비슷한 제목들이 붙어 있었다. 그후 삼년이 흐른 뒤 첫머리를 쓰기 시작해 다시 이태 뒤에 완성할 수 있었다. 마지막에 「나무 불꽃」을 쓰면서 ‘고통 3부작’이라는 파일명을 붙였던 기억이 난다.
출간 후 십오년의 시간이 세찬 물살처럼 흐르는 동안, 고백하자면 이 책에 복잡한 감정을 품고 있었다. 세간의 관심도 오해도 뜨겁고 날카로워, 혼자서 이 소설을 써가던 순간들의 진실과 동떨어진 것이 되어버린 듯 느낀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귀밑머리가 희어지고 어느 때보다 머리가 맑은 지금, 나에게는 이 소설을 껴안을 힘이 있다. 여전히 생생한 고통과 질문으로 가득 찬 이 책을.
개정판을 만들어주신 분들께,
새롭게 만나게 될 독자들께 고맙고 반가운 인사를 드린다.
2022년 이른 봄에
한강
음악을 잘 모른다. 평소에 특별히 조예가 깊었던 것도 아니다. 특별히 노래를 잘했던 것도 아니다. 이런 책과 음반을 내게 되리라고는 한번도 상상해본 적 없었다. 주변 사람들도 많이 놀라지만, 실은 자꾸만 놀라는 사람은 나 자신이다.
하지만, 어쩌면 그리 멀리 돌아나온 건 아닌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소설을 쓰기 전부터 시를 썼고, 시는 원래 노래에서 온 거니까. 노래를 만드는 일이 아주 낯설거나, 글쓰는 일과 아주 많이 다르다고 느껴지진 않는다고.
말과 침묵, 어둠과 빛, 꿈과 생시, 죽음과 삶, 기억과 현실 사이에 공간이 있다. 그 공간은 사이에만 있을 뿐 아니라, 그것들을 안팎으로 둘러싸며 가득차 있다. 내 말들이 그 공간을 진실하게 통과해 나올 수 있기를 간절히 빌었다. 캄캄한 흙 속을 비집고 내려간 흰 뿌리처럼, 어둠과 빛의 한 몸뚱이를 잎사귀까지 길어올릴 수 있기를 빌었다.
새벽녘에 꾸었던 꿈, 낯선 사람이 던지고 간 말 한마디. 무심코 펼쳐든 신문에서 발견한 글귀, 불쑥 튀어나온 먼 기억의 한 조각들까지 모두 계시처럼 느껴지는 때가 있다. 바로 그런 순간들이, 내가 소설을 쓸 때 가장 사랑하는 순간들이다. 여느 때와 같은 일상이지만 전혀 새로운 감각으로 부딪쳐오는 숱한 의문들, 짧고 강렬한 각성, 깊숙이 찌르는 느낌 속에서 나는 일종의 자유를 느낀다.
이 소설은 3년 전에 초를 잡아놓고 서랍 속에 넣어뒀다가, 지난해 2월에 꺼내 쓰기 시작했다. 소설과 함께 열두 달을 순회하는 동안 나에게 시간은 다른 속력으로 흘렀다. 언제나 그랬듯이, 내 몸에 머물렀던 소설은 가장 먼저 내 존재를 변화시킨다. 눈과 귀를 바꾸고, 당신을 사랑하는 방법을 바꾸고, 아직 걸어보지 못했던 곳으로 내 영혼을 말없이 옮겨다 놓는다.
직접 이름을 밝히기보다는 마음으로 인사드려야 할, 많은 영감과 도움을 주었던 분들에게 감사한다. 책을 만드느라 애써주신 문학과지성사의 여러분께도 감사드린다. 이렇게 쓸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살아 있다는 것에 나는 감사한다.
2002년 1월
첫 창작집을 낸 뒤 칠 년여 동안, 그사이 첫 장편소설을 삼 년간 쓰기도 하며, 제법 긴 간격을 두고 써갔던 단편들이다. 첫 단편집을 묶고 나면 그것이 매듭이 되어 다음 단편집이 변화한다고들 말한다. 이 소설들을 다시 읽으며 그 말을 실감했다. 이 책에서, 나는 나아가고 있다. 조금씩 몸을 뒤채이며 달팽이처럼 전진하고 있다, 그가 낼 수 있는 최대치 속도와 힘으로.
소설들의 배열을 바꾸었고, 몇몇 표현들을 손보았다. 이 책의 개정판을, 첫 소설집과 세번째 소설집의 사이에 나란히 놓아둘 수 있도록 도와주신 모든 분들께 머리 숙여 감사드린다. 표지에 사진을 싣게 해주신 이정진 작가님께도 감사드린다.
(...) 그랬다. 어리석게도 나는 이 책이 이대로 내 이력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내가 쓴 '내' 책이라고. 하지만 그 '나'라는 게 뭘까. 운동장 가에 날이 저물도록 앉아 있었던 아이, 대문 앞에 엉거주춤 서서 달을 올려다봤던 스물네살 난 여자애는 누구였을까. 이 한편 한편의 소설들을 썼던 사람은 누구였을까.
한번쯤, 그녀들을 다시 만나보고 싶다.
*
나는 때로 다쳤다. 집착했고 욕망했고 스스로를 미워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부끄러움을 배웠고, 점점 낮아졌고 작아졌고, 그래서 가난한 마음으로 삶을 조금씩 더 이해하게 되었던 것 같다. 오래, 깊숙이 들여다보려 애썼던 것 같다.
그러는 동안 글쓰기는 나에게 존재하는 방식이었다. 숨쉴 통로였다. 때로 기적처럼, 때로는 태연한 걸음걸이로 내 귀를 끌고 갔다. 나무들과 햇빛과 공기, 어둠과 불 켜진 창들, 죽어간 것들과 살아 꿈틀거리는 것들 속에서 모든 것이 생생했다. 그보다 더 생생할 수 없었다.
이 소설들은 원고 청탁을 받지 않고 썼다. 혼자서 써놓고는 서랍에 넣어두고 생각날 때마다 열어 조금씩 고쳤다. 그렇게 한 편 쓸 때마다 여러 달 시간을 들여서인지, 책 전체에 나 자신이 묻어나는 느낌이다. 물론 개인적인 경험들을 직접 옮겨놓은 것은 아니지만, 돌이킬 수 없이 배어든 정서들이 있다. 두텁디두텁게. 간절하게. 때로는 이상하리만치 선명하게. 찌르듯 고통을 주며.
알고 있다. 이 소설들을 썼던 십이 년의 시간은 이제 다시 돌아올 수 없고, 이 모든 문장들을 적어가고 있었던 그토록 생생한 나 자신도 다시 만날 수 없다. 그 사실이 상실로 느껴져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결코 작별의 말이 아니어야 하고, 나는 계속 쓰면서 살아가고 싶은 사람이니까.
가만히 하나의 매듭을 지어주신 문학과지성사의 여러분께, 지켜보아주셔서 감사하다는 인사를 드린다.
표지에 사진을 싣게 해주신 이정진 작가님께 감사드린다.
2018년 가을, 눈부시게 밝은 오후에
작고 연푸른 '몽고반점'은 나에게 먼 태고의 것, 식물성의 흔적이었다. 동물성에 반대되는 식물성이라기보다는, 고등생물이 되기 이전의, 근원성의 낙인 같은 것이라고 할까. 그 몽고반점에 사로잡힌 자가 추구하는 아름다움의 극단을 그리고 싶었다. 그 아름다움이란 사막 같은 덧없음을 내장한, 삶과 죽음이 동시에 격렬하게 깃들인 몸의 아름다움이다.
어떤 다짐이나 각오의 말을 하고 싶지는 않다. 언젠가부터 글쓰기는 나에게 밥 같은 것이었다. 자유와 위안, 충일로 몸을 덥혀주는 밥, 한동안 쓰지 못해 마음이 서늘하고 배고프던 때 수상 소식을 들었다. 부족한 글을 격려해 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어두워지기 전에, 하얗게 얼어붙은 강을 전철로 건넜다. 강의 가운데는 얼지 않아서, 얼음 가장자리에 물살이 퍼렇게 빛났다. 이제 정말 이 소설이 내 손을 떠난다는 사실이 실감되었다.
네 번의 겨울을 이 소설과 함께 보냈다. 바람과 얼음, 붉게 튼 주먹의 계절. 이 소설 때문에, 여름에도 몸 여기저기 살얼음이 박힌 느낌이었다. 때로 이 소설을 내려놓고 서성였던 시간, 뒤척였던 시간, 어떻게든 부숴야 할 것을 부수며 나아가려던 시간 들을 이제는 돌아보지 말아야겠다.
많은 분들께 소중한 도움을 받았다. 머리 숙여 감사드리며, 책의 말미에 따로 밝혀둔다. 거기 밝히지못한, 오래 마음으로 격려해준 이들께는 어떻게 인사를 건네야 할지.
이 소설은 일 년 반 동안 계간 『문학과사회』에 중반까지 연재했고, 그 후 다시 일 년 반쯤 처음부터 새로 고치며 써갔다. 예정보다 무척 더디었던 과정을 따뜻이 지켜봐준 문지의 여러분께 감사드린다.
이천십년 초입, 눈 내리는 새벽
문장에 대한 고심보다 어렵게 느껴진 것은 기억들이었다. 한 편씩 읽어가는 동안 그 시절의 공기, 내 몸과 마음의 상태 같은 것들이 차츰 생생하게, 종내에는 숨 막히도록 강렬하게 가까워오는 것을 느꼈다. 이를테면 「어둠의 사육제」는 새로 쓰는 것이 아니라 그저 교정을 보는 것인데도 힘에 부쳐 여러 번 쉬었다. 이 소설을 쓴 것은 기록적으로 무더웠던 1994년 여름이었는데, 석 달 가까이 ‘명환’을 죽이지 않아보려고 소설을 붙들고 있었다. 마지막 밤의 ‘영진’처럼 때로 몸이 떨리고 뜨거운 눈물이 솟았던 캄캄한 시간들이 아직 원체험처럼 남아 있다. 그 밖의 다른 소설들을 읽을 때에도, 아무도 모르게 그 속에 숨겨둔 사적인 경험들이 고스란히 다시 떠올랐다. 한 사람―이 소설들을 쓰던 나―에게 이상한 방식으로 뒤늦은 인사를 건네는 기분이었다. 낯설고도 친숙한 그 사람, 가까스로 그렇게 태어나고 있던 그 사람과, 불가능한 굳은 악수를 나누고 싶었다.
이 길뿐일까, 하는 끈질긴 의문을 버리고 나니 마음이 편해졌던 기억이 난다. 되돌아나가기에는 너무 깊이 들어왔다고, 꺼질 듯 말 듯한 빛을 따라 계속해서 걸어갈 일만 남았다고 생각하자 미처 상상하지 못했던 안도감이 찾아왔었다. 물에 빠진 사람이 가라앉지 않기 위해 팔다리를 허우적거리는 것처럼 썼고, 거품을 뿜으며 수면 위로 얼굴을 내밀 때마다 보았다, 일렁이는 하늘, 우짖는 새, 멀리 기차 바퀴 소리, 정수리 위로 춤추는 젖은 수초들을. 그래서 나는 그들에게, 그들의 어머니인 이 세상에게 갚기 힘든 빚이 있다.
느릿하고 힘 부치는 걸음걸이를 견디어주고 힘을 불어넣어준 분들에게, 부끄럽지만 이 책을 밝은 정표(情表)로 드리고 싶다.
- 한 강
1993년 10월부터 1994년 10월까지 약 일 년 동안 이 단편들을 썼다. 만 스물세 살에서 스물네 살에, 워낙 오래전에 쓴 글들이라서, 2007년에 개정판을 내며 한번 손보았음에도 불구하고 몇몇 문장들과 크고 작은 장면들을 고치고 다듬었다.
문학과지성사의 여러분께, 이십여 년 동안의 인연에 감사드린다. 표지에 작품을 싣도록 허락해주신 이정진 작가님께도 감사 인사를 드린다.
2018년 가을, 바람이 서늘해진 서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