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애써 12년 전 <가랑비 속의 외침>을 쓸 때를 떠올려본다. 그때 나는 늘 내 유년과 소년 시절의 얼굴을 베고 잠들지는 않았던가? 안타까운 것은 이미 아무런 생각이 나질 않는다는 것이다. 그저 기억 깊은 곳에서 수많은 행복의 느낌과 수많은 쓰라림의 느낌이 떠오를 뿐이다.
세상에는 기억에 관한 책이나 기억을 통해 표현해내는 책들이 많다. 나 역시 부족한 능력이나마 처음부터 끝까지 기억으로 꿰어진 소설 한 편을 썼다. <가랑비 속의 외침>이 바로 그것이다. 이 작품은 내 자전적인 이야기는 아니지만, 그 속에는 내 유년과 소년 시절의 감정과 이해가 녹아 있다. 물론 이 감정과 이해는 기억이라는 방식을 통해 온기를 얻었다.
나는 글쓰기가 끊임없이 기억을 환기시켜줄 수 있다는 사실을 경험했다. 이 같은 기억은 기껏해야 사사로운 일에 불과하지만, 한 시대의 형상일 수도 있다고 믿는다. 어쩌면 한 개인의 정신 깊은 곳에 찍힌 세계의 낙인, 아물 수 없는 흉터라고 할 수도 있겠다. 글쓰기는 내 기억 속의 수많은 욕망을 환기시켰다.
이러한 욕망들은 과거 생활 속에서 있었던 것일 수도 있고 근본적으로 없었던 것일 수도 있으며, 실현한 것일 수도 있고 근본적으로 실현 불가능한 것일 수도 있다. 나의 글쓰기는 그것들을 한데 모아 허구의 현실 속에서 합법화했다.
사람들은 나에게 물었다. "왜 이런 작품을 쓰는가?" 이해할 수 없다는 눈길로, 나에게 질문하고 했다. "왜 이렇게 많이 죽음과 폭력에 대해서 쓰는 것인가?" 이는 작가가 속 시원히 해명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다만 그들에게 우리 사는 데에서 이런 것들이 없는지 한번 찾아보라고 이야기한 적은 있다. 삶에 왜 이렇게 많은 죽음과 폭력적인 상황들이 존재하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이 문제에 관해서라면 삶은 아무 말 없이 대답해줄 것이다.
...그 당시 사람들은 툭하면 나에게 물었다. "왜 이런 작품을 쓰는가?" 이해할 수 없다는 눈길로, 나에게 질문하곤 했다. "왜 이렇게 죽음과 폭력에 대해서 쓰는 것인가?"
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이 문제에 관한 한 나는 그들보다 아는 게 결코 많지 않았다. 이는 작가가 속시원히 해명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다만 그들에게 우리 사는 곳에 이런 것들이 없는지 한번 찾아보라고 이야기한 적은 있다. 왜 이렇게 많은 죽음과 폭력적인 상황들이 삶에 존재하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이 문제에 관해서라면 삶은 아무 말 없이 대답해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허삼관 매혈기>는 '평등'에 관한 이야기다. 다소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어쨌거나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 아는 것도 별로 없고, 아는 사람도 많지 않으며 자기가 사는 작은 성 밖을 벗어나지 않아야 길을 잃지 않는 사람이 있다. 당연히 다른 이들처럼 그에게도 가정이 있고, 처와 아들이 있다. 역시나 그는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남들 앞에서는 다소 비굴해 보이지만, 자식과 마누라 앞에서는 자신만만해 집에서 늘 잔소리가 많은 사람이다.
... 그는 머리가 단순해서, 잠잘 때야 꿈을 꾸겠지만 몽상 따위에 젖어 살지는 않는다. 깨어 있을 때는 그도 평등을 추구한다. 그러나 야곱 알만스의 백성과 달리 절대로 죽음을 통해 평등을 추구하지는 않는다. 그는 사람이 죽으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는 그의 생활이 그렇듯 현실적인 사람이다. 그러므로 그가 추구하는 평등이란 그의 이웃들, 그가 알고 있는 사람들의 그것과 다를 바가 없다. 그는 아주 재수 없는 일을 당했을 때 다른 사람들도 같은 일을 당했다면 괜찮다고 생각한다. 또 생활의 편리함이나 불편 따위에는 개의치 않지만 남들과 다른 것에 대해서는 인내력을 잃고 만다.
그의 이름은 '허삼관'일지도 모른다. 안타깝게도 허삼관은 일생 동안 평등을 추구했지만, 그가 발견한 것은 결국 그의 몸에서 자라는 눈썹과 좆 털 사이의 불평등이었다. 그래서 그는 불만 가득한 목소리로 이렇게 푸념을 늘어놓았다.
"좆 털이 눈썹보다 나기는 늦게 나도 자라기는 길게 자란단 말씀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