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오래 살아서 몹시 야위거나 일찍 죽어 뼛가루가 될 것이다. 다다르기 전까지는, 어디에 수렴하게 될지 알 수 없다. 나는 핼쑥한 모선에 지나지 않고, 가상의 종착지들을 점괘처럼 쥐고 흔들 수 있을 뿐이다. 지금 이 글이 결국 이렇게 종점에 도달하듯이. 수렴점을 향해 기우는 운명 하나하나를 생각하며.
이 소설은 2021년 3월 25일에 썼다. 이후에도 조금씩 손을 대기는 했지만, 크게 달라진 부분은 없다. 기실 달라진 건 소설이 아니라 나일 것이다.
1년 사이에 많은 일을 겪었다. 졸지에 영화감독이 되어보기도 하고. 영화제 GV 시간에 한 관객이 물었다. 어떤 사건이 있었기에 이렇게나 조부를 미워하게 되었는지. 나는 할아버지를 미워하는 마음으로 이 소설을 썼나? 그때는 대답을 흐렸지만, 지금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아니, 나는 할아버지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썼다. 그 마음을 여기에 남겨둔다.
노인들은 내 얼굴에서 오래전에 죽은 조상들의 기품과 권위를 읽어낸다. 노인들이 하나둘 세상을 모두 떠나고 나면, 더는 누구도 내 얼굴에서 조상들의 흔적을 찾아 읽지 못할 것이다. 나는 상상한다. 언젠가 미래에 내가 백발의 노인이 되었을 때, 한때 내가 누구였고 또 어떤 인간이었는지를 기억하는 사람이 아무도 남지 않았을 때, 앞서 죽은 망자들의 손길과 유령들의 목소리로부터 자유롭게 놓여나는 시간을.
소설을 다 쓴 뒤로, 할아버지가 자주 꿈에 찾아온다. 우리는 검정색 정장을 차려입고 외따로 대화를 나눈다. 장소는 그가 임종을 맞이했던 바로 그 주택― 고척동 아파트이다. 다른 가족들은 제각기 일을 치르느라 무척 바빠 보인다. 우리는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사물이 된다. 할아버지는 슬픈 얼굴로 말한다. 종원아, 이제 아무도 나를 못 알아본다. 아무도 나를 못 알아봐. 나는 끊임없이 말할 것이다. 아무렴 어때요, 할아버지. 우린 이제 자유로워요.
책 뒤에 수록된 박지일 시인과 이소 평론가의 글이 보여주듯, 우리 모두는 죽은 영혼들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하나의 소설이 개인적인 기록으로 그치지 않도록― 사랑하는 옛사람을 오랜만에 무덤 바깥으로 불러내어준 두 사람에게 깊은 고마움을 건넨다. 또 책이 나올 수 있게 도움 주신 대산문화재단에도. 흔쾌히 장편을 제안해주신 문학과지성사, 책이 시작되는 자리와 끝나는 자리에서 애써주신 최지인, 김필균 편집자께도 특별히 감사 인사를 적어두고 싶다.
림보가 불타 없어진 자리에서도 삶은 계속될 것이다.
우리는 열매가 되기 위해 꽃을 죽여야만 하는 운명을 타고났다.
종족과 시대를 막론하고, 생명은 언제나 위쪽으로 검을 겨눈다.
선조들은 대좌를 빼앗기는 고통으로 눈물 흘리지만,
후손들은 사랑하는 옛사람의 머리를 제 손으로 자르며 눈물 흘리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옛사람들의 그림자 바깥으로 도망치려고 애쓰면서도,
죽은 영혼들의 목소리를 엿듣기 위해 엉금엉금 무덤가로 되돌아가곤 한다.
그러니까 당신이 이 책을 읽을 때, 사랑하는 노인을 한 사람 떠올렸으면 좋겠다.
또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꼭 들려주었으면 좋겠다.
당신은 당신이 떠올리는 옛사람과 얼마나 닮아 있으며, 어떻게 다른지.
그리고 결국은 당신이 그를 얼마나 그리워하는지.
세상은 사랑을 회복할 것이다.
2022년 여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