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6년, 중국 광동의 광주에서 태어나 가족과 함께 4세에 홍콩으로 갔다. 마테오 리치 대학에서 교육을 받았고, 중국 학생 위클리 씨어터 컴퍼니의 배우 겸 회원이 되었다. 그는 19세에 실험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으며, 영화 학교를 다니는 대신, 번성하는 홍콩 영화 산업에서 자리를 찾았다. 당시는 이소룡의 쿵후 후반 시기로 접어든 때였다. 오우삼은 1969년 케세이 필름에 조수로 입사했고 1971년 쇼 브라더스로 옮겨 조감독 생활을 시작했다. 이때 오우삼은 홍콩무협영화의 장인이었던 장철의 조감독으로 일하면서 영화기법을 배웠다. 1975년 <철한유정>로 감독 데뷔를 했다. 그리고 나서 골든 하베스트와 이례적인 계약을 체결했다. 이후의 두 편 <드래곤 테이머>(1974)와 성룡이 처음 막 주요 배역을 맡은 작품 <소림문>(1975)은 둘 다 성공작이었다. 그는 광동 오페라 영화 <제녀화 Princess Chang Ping>(1975)에서도 성공을 거두지만, <취권>(1976)과 <전작괴 From Riches To Rags>(1977)를 포함한 코미디 8편을 성공시키면서 아시아 영화제작에 있어서 주요 세력을 형성했다.
10년간 평범한 감독 경력을 보낸 오우삼은 1983년 골든 하베스트를 떠나, 새 회사인 시네마 시티에 합류했다. 그는 여기서 이제는 전설적인 로맨틱 갱영화가 된, 주윤발 주연의 <영웅본색>(1986)을 연출한다. 그에게 이 영화의 연출을 맡긴 것은 이 영화의 제작자이던 서극이었다. <영웅본색>은 세련된 누아르 스타일을 보여줌으로써 큰 성공을 거두었고 오우삼은 뒤이어 <영웅본색 2>(1987), <첩혈쌍웅>(1989), <첩혈가두>(1990), <첩혈속집>(1992) 등의 홍콩 누아르 수작을 연이어 발표했다. <첩혈쌍웅>은 주윤발과 함께 만든 범죄 스릴러로 국제적인 히트를 쳤고, 주윤발의 마지막 주연 영화이기도 한 <첩혈속집>은 관객과 영화 제작자 사이에 열성 팬을 낳았다.
서서히 자기 스타일과 이야기를 복제하는 매너리즘에 빠졌던 오우삼은 코미디로 변화를 꾀했던 <종횡사해>(1990)의 실패 이후 꾸준히 할리우드로의 진출을 모색했고 92년 <첩혈속집>의 완성 직후 할리우드로 건너갔다.
오우삼은 장 클로드 반 담의 < 하드 타켓>으로 1992년 할리우드에 감독으로 데뷔했다. 1994년에는, 파트너인 테렌스 창, 크리스토퍼 갇시크와 함께 20세기 폭스사 스튜디오에 Wcg 엔터테인먼트를 세웠다. 존 트라볼타와 크리스찬 슬레이터가 주연한 영화 < 브로큰 애로우> 외에도 Wcg는 오우삼이 폭스사를 위해 영화를 텔레비전 영화로 다시 연출한 <종횡사해 2(Once A Hero)>와 액션 스릴러 < 페이스 오프>를 만들었다. <페이스 오프>는 오우삼의 대표작인 <첩혈쌍웅>을 상당 부분 재인용한 것이다. 그는 < 미션 임파서블 2>를 통해 액션 스타일을 맘껏 펼쳐보였는데, 비평가들의 혹평과 영화팬들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전세계적인 히트를 기록했다.
이후 오우삼은 계속해서 그의 특기를 살린 액션 느와르 작품을 주로 하면서 2008년에는 삼국지의 적벽대전을 영화화 한 영화 <적벽> 2부작으로 중국 고전을 스펙터클한 블로버스터로 재탄생시키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