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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이원희

출생:1955년, 대한민국 경상북도 영천

최근작
2024년 5월 <일본서기는 위서(僞書)다>

이원희

고대 법대 졸업.
1981. 사법시혐 합격. 검사와 변호사 역임.
2003. 경남지방변호사회 회장.
현재 공증인.

「일본어는 고대에 한국에서 건너간 것이 아닐까?」라는 의문을 풀기 위하여, 일본 고대어와 고대사를 연구. 5~7세기에는 가야와 백제가 순차로 왜를 지배하였다고 결론 내림.

저서
『속국 왜국에서 독립국 일본으로』(2022)
『천황가의 기원은 백제 부여씨』(2019)
『일본열도의 백제어』(2018)
『천황과 귀족의 백제어』(2015)  

대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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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말

<천황가의 기원은 백제 부여씨> - 2019년 8월  더보기

머리말 중에서 1. 2015년 가을의 어느 날, 일본의 고고학 서적을 읽다가, 대략 다음과 같은 취지의 문장을 읽고는 눈이 번쩍 뜨이는 느낌이 들었다. 「『일본서기』에 나오는 수많은 천황 중, 그 무덤을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은 38대 천지(天智)릉과 그 뒤를 이은 천무(天武)와 지통(持統)의 합장릉 둘 뿐이다」 일본 고고학의 확립된 통설이다. 필자는 이 대목에서 큰 충격을 받았다. 바로 필자가 졸저 『일본 천황과 귀족의 백제어』에서 「『일본서기』에 기록된 역대 왜왕 중, 시조 신무(神武)부터 37대 제명(齊明)까지는 창작된 허구의 인물이고, 38대 천지(天智)부터 실존인물이다」라고 주장한 것과 결론에서 완벽하게 일치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때부터 필자는 일본의 왕릉(천황릉)에 관하여 알아보아야 하겠다는 생각에, 이에 관한 책을 구할 수 있는 한 수집하여 읽어 보았다. 그리하여 얻은 결론은 37명의 왜왕이 날조된 가공인물이기에, 그 무덤이 있을 리가 없고, 따라서 왜왕릉에 관한 일본 고고학의 통설은 지극히 당연한 사실을 지적한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면 창작된 왜왕들의 신하인 귀족, 호족들은 어떠한가? 『일본서기』나 『고사기』에 등장하는 귀족들은 왜왕과 마찬가지로, 거의 대부분 창작된 가공인물이었다. 즉 기원전 667년에 즉위하였다는 시조 신무(神武)부터, 661년에 사망하였다는 37대 제명(齊明)에 이르기까지, 1,328년간의 왜국 고대사에 등장하는 왜왕 전부와 귀족들 대부분은 날조된 가공인물이었다. 이 두 사서는 허구의 왜왕과 왕후, 왕자, 귀족, 그들이 연출하는 가공의 사건들로 이루어진, 꾸며낸 창작소설인 왜국의 역사를 기록하였던 것이다. 2. 진실된 왜국 고대사를 밝히면 절대 안되는 이유가 있었기에 이렇듯 역사를 날조하였을 것이다. 진실은 무엇인가. 왜국을 지배한 것은 토착왜인이 아니라 백제인이었다. 왜왕은 백제의 왕자였고, 백제에서 파견한 귀족들이 왜국을 통치하였던 것이다. 『고사기』와 『일본서기』가 발간된 8세기 초, 천황을 비롯한 일본 지배층에서는 그러한 사실을 완벽하게 감추면서, 자신들의 선조가 태곳적부터 왜국에서 토착왜인들을 지배하여 온 양, 창작소설을 만들어 낸 것이다. 인구수에서 압도적으로 다수인 토착왜인들을 민족분규 없이 안정적으로 지배하기 위하여, 백제인이라는 정체성을 버리고 스스로 왜인이 되는 길을 선택하였는데, 이러한 「왜인화 정책」의 핵심적인 포인트가 바로 이 역사창조였다고 생각된다. 소수민족으로서 중국을 지배한 몽골인이나 만주족은 정체성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였으나, 백제인들은 정반대의 노선을 선택하였던 것이다. 3. 이렇듯 창작된 역사를 기록한 『일본서기』이지만, 중세의 일본 지식층에서는 「조국 대일본의 위대한 역사」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이것도 부족하다고 생각하였던 모양이다. 그래서 원본 『일본서기』의 곳곳에 가필하여 새로운 변작을 감행하였다. 지금은 일본 사학계에서 폐기된 담론인 「임나일본부」에 관한 엄청난 분량의 기사가 대표적 사례이다. 서문이 사라진 것, 무수하게 등장하는 백제, 고구려, 신라의 조공 기사 역시 후세 변작자의 소행인 것이 분명하다. 『일본서기』는 태생부터가 창작된 허구의 역사를 기록하였는데, 거기에다 수차에 걸쳐 후세 사람의 혹심한 변작까지 보태어졌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4. 두 사서는 37대나 되는 가공의 왜왕과, 그에 따른 수많은 왕후, 왕자, 귀족, 사건들을 날조하였으므로, 수많은 창작상의 실수가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빠짐없이 기록된 왜왕릉 역시 진실과는 거리가 멀 수밖에 없다. 제 1장 「허구의 왜왕과 창작된 왜왕릉」에서는 이러한 날조된 왜왕과 왕릉, 무수하게 등장하는 창작상의 실수, 그리고 후세인의 수많은 가필과 변작에 관한 여러 가지를 규명하였다. 제 2장 「왜국 귀족들의 창작된 시조」에서는 귀족들의 뿌리와 그 원적, 그리고 천황가와 지배층의 기원에 관한 창작설화인 고천원(高天原) 설화에 관하여 살펴보았다. 8세기 초 일본의 지배층인 백제인들이, 스스로가 토착왜인인 양 역사를 날조하였지만, 자신들의 뿌리가 완벽하게 잊혀지는 사태는 결코 원치 않았던 모양이다. 고천원 설화는 뿌리를 후대에 전하기 위한 일종의 암호문에 다름 아니다. 제 3장 「고대 왜국의 원풍경」에서는 고대 금석문 등을 통하여, 두 사서의 기록과는 전혀 다른 왜국의 원풍경을 들여다보았다. 보이는 것은 왜국의 맑은 공기를 숨쉬며 활동하던 백제인들의 발자취뿐이었다. 8세기 이후의 천황가에서는 가공의 선조 왜왕들에게 제사를 올렸을까? 신무(神武)를 시조로서 특별하게 존숭하고 받들었을까? 허구의 왜왕들에게 어떠한 관념을 가지고 있었을까? 천황가의 뿌리와 직결되는 아주 중요한 문제인데, 이러한 의문을 제 4장 「천황가의 제사」에서 풀어보았다. 제 5장 「실존 왜왕, 천황 노래의 백제어」에서는 천지(天智)를 비롯하여 실존하였던 왜왕과 천황들이 지은 만엽가에 등장하는 백제어를 규명하였다. 이들은 예외 없이 백제어에 능통하였을 뿐만 아니라, 백제식 일본어를 구사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제 6장 「천황가의 기원」에서는 금석문에 나오는 기록을 단서로 하여, 천황가의 원래 성이 백제 부여씨라는 사실을 증명하여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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