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에 기습당한 인생
남들은 취미로 감상하는 예술을 전문적으로 비평하는 일을 업으로 삼았다. 어쩌다 이런 선택을 했나 자책할 때가 없지 않다. 그러나 어차피 나는 이렇게 살 수밖에 없는 인간이 아니었을까. 그런 체념인지 긍정인지 모를 생각을 자주 한다. 예술에 관해 말하거나 쓰는 일 말고, 다른 일을 평생 하라고 한다면(다른 일도 좀 해 본 적 있다) 그 시간을 계속 버텨 낼 자신이 없다. 의심 많은 성격 탓이겠지. 한 가지 진리를 확신하는 타입이었다면 종교인이 됐을 테다. 천성이 회의적인 나의 안테나에는 명확한 답을 전하는 신학보다는, 복잡한 질문을 던지는 예술 주파수가 또렷하게 잡혔다.
예술은 명확한 답이 아니라 복잡한 질문을 던진다고 썼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리 예술을 많이 접해도 실용 지식은 쌓기 어렵다. 예컨대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탐독해 봤자 자격증 따는 데는 전혀 도움이 안 된다. 랭보의 『지옥에서 보낸 한 철』을 독해하는 실력은 주식이나 부동산 투자를 잘하는 능력과 하등 상관이 없다. 많은 사람에게 감화를 준 자기 계발서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에 적힌 간명한 가르침에 대해서도 예술에 빠진 사람은 의문을 품는다. 성공의 정의부터 애매하잖아! 그걸 측정할 수나 있는 거야? 이 같은 삐딱한 성향을 가진 사람일수록 예술과 친해지기 쉽다.
데카르트는 모든 것을 의심한 끝에 사유하는 주체를 발견했으나, 나는 아직 아무것도 결론 내린 게 없다. 영영 결론 내리지 못할 거라는 예감만 든다. 그런데 뒤집어 보면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일생을 예술과 동행할 수 있을 거라는 묘한 위안을 얻는다. 출구 없는 미로에 엔딩은 없을 테니. 예술계 중심부(?)에서 활약하는 영향력 있는 인물이 되지 못한 채, 그 언저리만 맴돌다 잊히게 될 확률이 훨씬 크다는 사실 정도는 안다. 그렇지만 어떡하나. 세상에 인정받지 못하고 잊히든 말든 그것은 내 소관이 아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예술에 관해 말하거나 쓰는 일을 포기할 마음이 없다.
말할 기회가 없다면 개인 채널을 만들고, 쓸 지면이 없다면 블로그에 올려야지. 각오라고 표현하기에는 거창하지만 그렇게 되뇐다. 유명인이 되지 못해도, 안정된 삶을 누리지 못해도, 예술에 관해 말하거나 쓰는 일이 내 삶의 거의 전부라서 그렇다. 과장하거나 폄하할 것도 없다. 그저 이를 내 삶과 일치시키고자 했을 뿐이다. 스스로 삶을 놓아 버리지 않는 한, 이대로 어떻게든 살아가는 수밖에 없다. 혼자만의 결심은 아닐 것이다. 대부분의 예술가 혹은 예술가 지망생들이 그럴 테지. 부디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이 길로 뛰어든 어리석은 자가 없기를!
여타 분야도 마찬가지겠지만, 자기 이름을 알릴 수 있는 예술가는 백 명 중 한둘에 지나지 않는다. 예술가 지망생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부귀영화를 성공 기준으로 잡는다면 극소수를 제외한 나머지는 처참한 실패를 예약하고 있다. 나는 예술가 지망생에게, 실은 나에게, 다음과 같은 전언을 들려주고 싶다. ‘당신은(나는) 세속적 성공을 성취하는 데 실패했을지언정 인생 전체를 실패한 게 아니다. 오히려 당신은(나는) 누구보다 성공한 인생을 살았는지도 모른다.’ 궤변? 글쎄, 나는 여기에 근거를 두고 있다. 영문학사에 족적을 남긴 작가 E.M. 포스터가 장편소설 『하워즈 엔드』에 쓴 구절이다.
“우리는 엄청난 노력과 용기를 기울여서 오지도 않을 위기에 대비한다. 가장 성공한 인생은 산이라도 옮길 만한 힘을 낭비한 인생일 것이다. 그리고 가장 성공하지 못한 인생은 준비 없이 기습당하는 인생이 아니라, 준비하고 있는데 기습이 닥치지 않는 인생이다.” 예술가로 살기란 달리 보면 “산이라도 옮길 만한 힘을 낭비한 인생일 것이다.” E.M. 포스터는 이편이 열심히 “준비하고 있는데 기습이 닥치지 않는 인생”보다 낫다고 평한다. 반박하는 사람이 있겠으나 나는 그의 통찰에 동의한다. 준비 없이 예술에 기습당해서다. 허송세월한다고 세간으로부터 비난받는, 준비 없이 예술에 기습당한 이들 역시 그럴 것이다.
영화도 준비 없이 나를 기습한 예술이다. 영화는 시간과 윤리를 성찰하는 방식에 대해서, 문학과는 또 다른 형태의 고민으로 이끌었다. 그럼에도 늘 문학하는 마음으로 영화를 보았다. 문학하는 마음이란 특정한 사건과 마주한 등장인물, 그리고 그들을 바라보며 일어나는 독자의 감정을 아울러 살피려는 태도를 뜻한다. 거기에 바탕을 두고 ‘당신의 독자적인 슬픔을 존중해’를 표제로 삼았다. 슬픔이라는 단어를 썼지만 이것을 기쁨으로 바꿔도 무방하다. 슬픔과 기쁨을 포함한 우리가 느끼는 모든 정서는 그 자체로 독자적이고 존중받아 마땅하다. 다름을 같음으로 환원하려는 폭력이 만연한 시대일수록 그 가치는 빛난다.
그러한 입장에서 예술은 보는 것이 아니다. 읽는 것이 아니다. 탐식하는 것이다. 근사한 언어를 꼭꼭 씹어 삼킨다. 거기에 담긴 창작자의 사유로 다시 생각을 공글린다. 그럴 때 나는 나의 깜냥보다 넓고 깊으며 집요한 사고를 할 수 있다. 이것을 내 삶과 연결된 언어로 풀어내지 않으면 안 된다고 느낀다. 소설가 보후밀 흐라발의 말마따나 ‘너무 시끄러운 고독’ 때문일 것이다. 타인으로 인해 생겨 나는 외로움과 달리, 자기 자신으로 인해 발생하는 고독은 결코 조용한 법이 없다. 누군가 고독에서 고요를 떠올린다면, 그는 고독의 한가운데에 아직 들어가 본 적 없는 사람임에 틀림없다.
고독의 한가운데는 소란스럽다. 나의 그곳에는 그동안 쌓인 언어들이 웅성댄다. 고독을 탐색한 결과물이므로 이 글은 감독과 영화를 설명하는 데 목적을 두지 않는다. 그러나 혼자만의 공상으로 그치지도 않는다. 이를테면 이는 당신이 느끼는 고유한 서정에 가닿을 것이다. 언어 행위는 무언가가 지금 여기에 없음을 자각함으로써, 그것이 존재했고 혹은 여전히 존재함을 증언하는 일이기에 그렇다. 어떤가 하면 나는 문학하는 마음, 그중에서도 시를 읽는 마음으로 영화를 보았다. 시적 자아로 영상 언어를 탐식했다. 일상적 자아는 일상을 의심 없이 적응하도록 하는 데 비해, 시적 자아는 일상의 균열을 발견하고 주변인으로 남도록 한다.
그렇게 이 세상에서 딴 세상을 살기가 녹록하지는 않다. 하지만 이쪽 영화와 저쪽 영화를 왕래하는 움직임 속에서 마치 나는 두 개의 세계를 동시에 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덕분에 양쪽의 현실을 전부 긍정하지는 못해도 존중할 수 있게 되었다. 나의 수선스러운 고독에서 출발하여 당신의 심연에 도착하려는 쓰기의 모험 역시 그러지 않을까. 책을 쓰는 사이 영화 같은 일이 나에게 실제로 일어났다. 짝을 만나 가정을 이뤄 아이를 낳아 기르는 생활은 스크린에서만 보아 오던 낯선 장면이었는데, 이제는 일상이 된 것이다. 2022년 여름 평생의 반려가 되기를 약속한 도연, 2023년 봄 우리의 딸로 와준 시율로 인해, 영화 같지 않던 나의 세상은 어느새 영화가 되어 있었다.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라던 철학자의 선언이 나에게는 이렇게 실현된 셈이다. 언제나 예술은 인생을 기습한다.
2023년 여름의 끝자락을 지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