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문경에서 태어났으며, 1992년 문화일보에 단편소설 <산 너머에는 기적소리가>가 당선되어 작가가 되었습니다. 이듬해에 장편소설 《흰뱀을 찾아서》로 오늘의 작가상을 받았습니다.
이후 장편소설 《나비는 어떻게 앉는가》, 《동백나무에 대해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들》, 《희망노선》과 소설 창작집 《우체부가 없는 사진》, 《도라지꽃 신발》을 펴냈습니다. 2006년 청소년 장편소설 《나는 아버지의 친척》을 발표한 이후로는 《라디오에서 토끼가 뛰어나오다》, 《사투리 귀신》, 《키스감옥》, 《걸걸한 보이스》, 《애니멀 메이킹》, 《인간 합격 데드라인》, 《스웨어 노트》, 《비공개 2인 카페》, 《감정 보관함》, 《너를 부르는 꽃》, 《부럽거나 부끄럽거나》, 《낙원의 아이》를 출간했으며 장편동화로 《이웃집 영환이》, 《코끼리는 내일 온다》, 《특별한 이웃=□》가 있습니다.
이 년 전쯤 ‘에피소드 제조법’이라는 구절을 떠올린 것이 이 소설에 대한 직접적인 씨앗이었던 것 같다. 그 로 이런저런 사정에 의해 도무지 쓸 기회를 잡지 못하다가 올 초에 큰맘 먹고 보따리를 싸서 지방으로 내려가 집필에 착수했다.
당시의 집필 환경이 아주 좋지는 않았던 것 같다. 나로서는 집을 떠나 써보는 것이 처음 있는 일이기도 했다. 게다가 ‘에피소드 제조법’이라는 구절 하나만 달랑 생각해둔 상태였을 뿐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하지만 일단 첫 문장을 시작하고 나자 세상 모든 사람들이 힘을 합쳐 나를 돕는 것 같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필요한 정보들이 툭툭 날아와 내 컴퓨터 안에 저장되었다. 이를테면 나도 작가의 말 모르게 컴퓨터 커서가 “교회에서 베프가 된 인애였다.”라는 문 장을 쳤고, 교회에 관해 아무것도 몰랐던 탓에 기독교 신자인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너는 지금 하느님과 관련해 무엇을 고민하고 있는데?” 물었더니 그 친구가 “하느님 말씀은 일점일획도 오류가 없다는 것.”이라고 거창하게 대답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성경 말씀의 번역과 변형이 자신의 사유에 미친 영향에 관해 몇 마디를 덧붙였다. 문제는 원래 좀 뒤퉁스럽던 내가 친구의 말을 “일점일도 오류가 없다고?”라는 식으로 받아쳤다는 것이다. 우리는 한참 웃고 나서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이 에피소드는 그대로 소설 속으로 도입되었다.
일점일이라는 유머코드를 에너지로 삼아 열심히 쓰다가 글의 흐름이 막혔을 때였다. 내가 묵고 있던 숙소의 스텝 중 한 분이 능구렁이를 먹여 키운, 한 알에 백만 원 하는 달걀에 관해 이야기해주었다. 그런데 이 달걀에 대한 태도와 생각이 사람마다 다 다르다는 것이 무척 흥미로웠다. 이 에피소드에 대한 논쟁 역시 자연스럽게 소설 속으로 초대되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단편소설 작업을 병행하느라 <걸girl한 boys>를 다 완성하지 못하고 서울로 돌아왔을 때 교회에 처음 간 시골 할머니가 목사님 앞에서 ‘관심보살’이라고 기도하는 유머 동영상이 카톡으로 도착했다. 마치 내가 그런 게 필요하다며 주문이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마지막으로 퇴고를 진행하면서 서울시립미술관에 갔다가 ‘그린 망치’라는 영감을 얻어왔다.
이 소설을 쓰면서 내가 한 역할은 ‘일점일’과 ‘관심보살’이 내가 쓰려고 하는 주제에 꼭 필요한 포인트라는 것을 알아본 것 정도랄까. 부품은 모두 남들이 주고 나는 그냥 조립만 한 것 같을 때가 있었다. 이 소설에 관한 한 나는 매우 운이 좋았다.
나는 동일한 장소에서 같은 것을 바라보면서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한다. 내 프레임 안에 들어온 장면은 한순간도 같은 적이 없었다. 내가 쓰는 소설도, 내가 사는 인생도 그런 식이라는 생각을 자주 한다. 패턴으로 향하는 원본들을 변형하고 비틀고 쪼개고 갈아엎는 것. 세상에 이보다 재미있는 일이 있을까.
지금 이 순간 내가 설치한 프레임 안에는 뭐가 들어와 있을까.
그것이 궁금해서 예술가들은 소설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영화를 만든다. 나도 그렇다.
우리 모두 오늘 하루만이라도 상투적인 것들에 무릎 꿇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