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는 남부 독일의 작은 도시 메스키르히에서 태어났다. 유년기에는 문학을 탐독했으며, 대학에서는 신학과 철학을 공부하였고, 1928년에 스승 에드문트 후설의 후임으로 프라이부르크 대학에 부임하여 그곳에서 줄곧 철학을 가르쳤다. 1927년 출간한 『존재와 시간』으로 순식간에 세계 지성계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니체, 프로이트, 마르크스가 제도권 철학 바깥에서 전통 철학에 균열을 냈다면, 이 저작을 통해서 하이데거는 제도권 내부에서 전통 철학을 폭파시키고 현대 철학의 문을 활짝 열었던 셈이다. 철학 이외의 영역에서 그의 삶은 평범하고 순탄한 편이었으나 두 가지 큰 스캔들에 연루되었는데, 하나가 1933년 나치에 입당하여 대학 총장이 되었던 일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학생이었던 한나 아렌트와의 연애 사건이었다. 양차 세계 대전을 몸소 경험한 하이데거는 서양의 전통적인 형이상학을 근본적으로 비판하였으며, 새로운 철학적 사유와 예술(시)의 가능성을 탐색했다.
하이데거가 한평생 몰두했던 문제는 ‘존재’였다. 전통 철학자들도 존재 문제를 두고 백가쟁명한 셈인데, 말하자면 존재에 대한 답으로서 플라톤은 ‘이데아’, 아리스토텔레스는 ‘에네르게이아’, 데카르트와 칸트는 ‘생각하는 나’, 헤겔은 ‘절대정신’, 니체는 ‘힘에의 의지’ 등등을 제출했다. 즉 그들 각자 나름의 존재 이해를 표명했던 것이다. 그런데 다양한 존재 이해 방식들을 관통하는 존재는 진정 무엇이며, ‘왜 없지 않고 있는가’? 이러한 물음 속에서 하이데거는 불안과 무를 말하고 존재의 역사를 말한다. 존재를 묻는 인간 실존을 묻기도 하고 존재 사건(Ereignis)을 말하기도 한다. ‘존재는 존재자가 아니다’라는 ‘존재론적 차이’를 숙고함으로써, 이후 현대 철학의 화두로서 ‘차이’를 제시한다. 모든 문제가 존재 물음에서 시작해서 다시 그 물음 속으로 되돌아간다. 그것을 사람들은 햄릿처럼 삶과 죽음의 경계에 처한 인간 존재의 본래적이고 불가피한 실존적 고민으로 해석하기도 하고, 파르메니데스 이래로 면면히 이어져 온 형이상학적 문제로 간주하기도 한다. 요컨대 하이데거에게 사유될 만한 최고의 문제는 존재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었다.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
하이데거의 저작은 난해하기로 악명이 높다. 그러나 진입 장벽이 낮은 저작부터 차근히 읽어 나간다면, 충분히 그의 주요 저작들을 독파할 수 있다. 처음 하이데거 철학을 접하는 이들에게 먼저 『형이상학의 근본 개념들 ? 세계?유한성?고독』을 권한다. 이 책은 하이데거가 1929~1930년 수업을 위해 준비한 강의록으로, 수제자인 오이겐 핑크가 다른 어떤 강의록보다 먼저 출간해야 한다고 간곡히 주장했던 글이다. 핑크를 비롯한 당시 많은 학생들은 이 강의에 열광적으로 매료되었다. 초입부터 하이데거는 독일 낭만주의 시인 노발리스의 경구, 즉 “철학은 본래 향수, 말하자면 곳곳을 고향처럼 만들려는 충동”이라는 말로 시작한다. 그리고 철학이란 헛된 사변과 공상의 산물이 아니라, 온몸을 던져야만 겨우 그 진리를 드러낼 수 있는 창조적인 작업임을 강조한다. 40대 초반의 하이데거가 손수 20대 초반의 젊은이들을 철학으로 인도하는 글이라 하겠다. 본론으로 들어가면, 글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하나는 권태에 관한 논의이고, 다른 하나는 동물과 인간의 차이에 대한 논의이다. 이런 이질적인 논의들이 어떻게 하나로 수렴될 수 있는지도 관심을 끌지만 무엇보다 각각의 주제, 즉 권태와 동물성에 대한 테마를 하이데거 특유의 방식으로 이끌어 가는 모습이 볼만하다. 책을 펼치기 전에 이런 질문들을 떠올려 보는 것도 독서에 도움이 될 것이다. 권태에는 어떤 종류들이 있을까? 동물들도 권태를 느낄까? 왜 인간은 권태에 사로잡히는 것일까? 권태는 마냥 부정적인 것이기만 한 것일까? 두 번째 테마에 관해서 하이데거는 세 가지 명제를 숙고하는 방식으로 논의를 이끌어 간다. 첫째, 돌은 세계가 없다. 둘째, 동물은 세계가 부족하다. 셋째, 인간은 세계를 형성한다. 하이데거는 이 명제들을 통해 무엇을 말하려 했던 것일까? 하이데거의 결론을 요약하자면, 인간과는 달리 동물은 세계의 진리를 밝히지 못한다. 그런데 정말 그러할까? 전도유망한 후배 철학자들, 곧 데리다와 아감벤의 비판은 바로 이 지점부터 시작된다. 그들에 따르면, 인간 중심주의에 빠진 전통 철학을 그토록 비판했던 하이데거도 결국 동물이 세계 형성에서 배제된다는 주장을 펼침으로써 또다시 인간 중심적 전통 철학에 빠져들었다는 것이다. 과연 그들의 하이데거 비판은 정당할까? 두 번째로 소개하고자 하는 책은 『숲길』에 수록된 「예술 작품의 근원」이라는 작은 글이다. 이 글은 사실 헤겔의 테제, 즉 ‘예술의 종언’ 테제와 철학적으로 대결한 작품이다. 헤겔은 당대의 예술이 더 이상 지적 헤게모니를 유지할 수 없다고 판단한다. 고대 그리스 이후에는 종교와 철학에 헤게모니를 넘겨줄 수밖에 없다는 주장이다. 그런데 정말 로 예술은 끝났을까? 하이데거의 통찰에 따르면, 헤겔 테제와의 진정한 대결은 단순히 헤겔 미학과의 대결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서양 형이상학 전체와의 대결을 의미한다. 헤겔의 테제는 전체 서양 형이상학의 근본 토양에서 도출된 필연적인 귀결이기 때문이다. 결국 그 테제를 반박한다는 것은 서양 철학 전체를 비판해야 하는 짐을 떠안아야 한다는 뜻이다. 존재에 대한 기존의 이해를 깨뜨리지 못하면, 헤겔의 테제는 언제까지나 유효하다. 하이데거는 ‘철학으로 지양되어 과거로 사라진 예술’이 아니라, ‘사유와 이웃하는 시(도래하는 예술)’를 말하고자 한다. 이러한 근본 기획을 배경으로 하이데거는 이 글에서 예술 철학의 중요한 물음들을 다룬다. 예를 들어 이런 물음들이다. 예술과 작품은 어떤 관계에 있을까? 사물과 도구, 그리고 작품은 어떻게 구분될까? 지금까지 서양인들은 사물 내지 도구의 존재 방식으로 예술 작품을 파악해 온 것은 아닐까? 작품 창작이란 무엇이며, 감상은 무엇일까? 감상도 작품을 구성하는 계기라 할 수 있을까? 칸트 이래로 많은 사람들은 예술을 진리의 영역에서 배제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그것을 포기한다는 것은 어쩌면 예술에 치명적인 일이다. 초원을 호령하던 사자에게 동물원 한구석에서만 자유롭게 노닐라고 말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하이데거는 예술이 ‘진리의 실현’임을 포기하지 않는다. 대신에 그는 ‘과학 친화적인’ 전통적인 진리관을 바꾼다. 즉 진리란 사물과 지성의 일치라는 고전적 의미에서가 아니라, 그 말의 시원적 의미인 알레테이아(aletheia, 비은폐성)로 이해한다. 그리고 이런 의미의 진리는 곧 ‘예술 친화적인’ 진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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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단계에서 추천할 만한 글은 『사유란 무엇인가』와 『횔덜린 시의 해명』이다. 먼저 『사유란 무엇인가』는 1951~1952년의 강의록으로 비교적 쉽게 읽히지만, 상식에 위배되는 생각을 전개한다는 점에서 녹록지 않은 책이다. 제목부터 ‘누구나 생각하면서 살고 있다’는 상식을 뒤흔든다. 나는 정말 생각하고 있을까? 하루 24시간 가운데 생각에 깊이 잠겨 본 시간은 얼마 정도일까? 도대체 사유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사람들은 철학자들이 공연히 쓸데없는 질문을 던진다고 한다. 일과 성과에 쫓기며 정신없이 살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사유란 무엇인가?’라는 질문도 그처럼 무익하고 뜬금없이 들린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기계나 로봇처럼 정해진 프로그램에 따라 움직이며 살고 있다면? 쳇바퀴를 돌리는 다람쥐처럼 살고 있다면? ‘미리 정해진 알고리즘에 따라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라고 의문을 던진 사람은 이제 막 사유를 시작한 셈이다. 그즈음에 이 책을 펼치면 도움이 될 것이다. 하이데거는 책 제목이기도 한 ‘사유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네 가지로 분석한다. 첫째, ‘사유’라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둘째, 지금까지 사람들은 무엇을 사유라고 생각해 왔는지, 셋째, 제대로 사유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 넷째,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사유하게끔 하는지를 묻는다. 특히 주목할 것은 마지막 물음이다. 지금 이곳에 살고 있는 우리를 사유하게끔 하는 것은 무엇일까? 하이데거에 따르면, 통상 우리는 사유하지 않는다. 심지어 과학자조차 사유하지 않는다. 단지 관성대로 생각을 이어 가며 살아갈 뿐이다. 게다가 개인의 고독한 결단만으로는 무사유 상태를 벗어날 수 없다. 먼저 거대한 규모의 사건, 대개는 고통스러운 사건이 발생해야 한다. 그제야 비로소 사유가 시작된다. 『횔덜린 시의 해명』에는 시와 문학에 관한 하이데거의 견해가 잘 드러나 있다. 이 외에도 특별히 이 책에서 성스러움에 관한 하이데거의 견해는 주목할 만하다. 니체가 ‘신의 죽음’으로 잘 표현했듯이, 현대는 세속화된 시대이지만 여전히 인간은 성스러움의 차원을 갈망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10대의 아이돌 숭배 혹은 돈에 대한 물신 숭배 등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세속화 시대에 성스러움을 성찰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어떤 경우에도 성스러움이 불가피하다면, 그것에 대한 분별력이라도 키울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시대의 성스러움은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훨덜린에 따르면, 지금의 시대는 성스러움이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밤이고, 성스러움이 사라져 간다는 사실마저 망각되고 있는 궁핍의 시대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성스러움을 다시 불러올 수 있을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이런 물음들이 바로 우리가 이 책과 함께 고민해야 할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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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단계로 『존재와 시간』과 『언어로의 도상에서』을 추천한다. 이 두 권의 책은 하이데거 전후기를 대표하는 작품이자 최고봉에 속하는 작품이다. 난해한 만큼이나 읽을 가치가 있다. 『존재와 시간』을 통해 하이데거는 전통 철학의 주요 문제인 ‘존재’를 밝히려 한다. 여기에서 그는 철학의 가장 오래된 주제인 존재를 가장 최신의 지적 흐름과 접목시킨다. 존재를 밝히려는 작업은 존재를 묻는 자, 특히 자기 자신의 존재를 문제시하는 자, 즉 인간 현존재에서 시작한다. 인간은 근대인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그저 ‘생각하는 고립된 실체’가 아니라, 오히려 처음부터 세계에 연루된 존재다. 예컨대 현미경 앞에서 사물을 객관적 관찰 대상으로 삼는 이론 세계나 작업장에서 무심결에 망치질을 하는 도구적 세계 모두 제각각 세계?내?존재인 현존재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현존재는 시간의 지평에 상응하여 크게 3중 구조를 보이는데, 하나는 과거부터 기분을 조율해 온 현사실성이고, 다른 하나는 미래의 가능성으로 기획 투사하며 이해하는 실존이며, 마지막으로 현재의 무엇인가에 빠져 있는 일상이 그것이다. 그것들이 비본래적인 모습을 보일 때에는 애매성, 호기심, 잡담의 형태로 나타난다. 하이데거는 현존재 분석과 현존재의 시간성 분석을 마친 다음, 존재에 관한 논의를 역사적 차원으로 확대하려 했으나 그 부분은 쓰지 못하여 결국 『존재와 시간』은 미완의 기획으로 끝나고 만다. 이 책의 주된 물음은 이것이다. 존재란 무엇이고, 그것을 묻는 인간은 누구이며, 존재를 드러내는 지평인 시간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언어로의 도상에서』는 하이데거의 후기 사상, 특히 언어관을 살펴볼 수 있는 텍스트다. 이곳에는 「언어」, 「시(詩)에서의 언어 ? 게오르그 트라클의 시에 대한 논구」, 「언어에 관한 대화로부터 ? 어느 일본인(J)과 어느 질문자(F) 사이에서」, 「언어의 본질」, 「말」, 「언어에 이르는 길」이 수록되어 있다. 각각의 글은 모두 언어에 대한 빼어난 성찰을 보여 준다. 사실 사유에 대해 사유하는 것처럼, 언어에 대해 말한다는 것 또한 ‘자기 지칭의 역설’에 빠진다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사유와 언어에 대해 묻지 않을 수 있을까? 일군의 학자들은 현대 철학을 의식 중심의 근대 철학과 비교하여 ‘언어로의 전회’를 감행한 철학이라고 규정하는데, 이러한 차원에서도 하이데거의 이 책은 중요한 언어 철학적 텍스트라 할 수 있다. 언어란 무엇이라 말할 수 있을까? 혹은 하이데거의 도발적인 주장처럼, ‘인간이 말하는 것일까 아니면 언어가 말하는 것일까’? 이와 같은 질문을 품고서 이 책을 탐독한다면, 아마도 언어에 관한 하이데거의 사유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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