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은 기원전 427년경 출생하여 기원전 347년경 사망하였다. 아버지 아리스톤과 어머니 페릭티오네의 집안은 모두 아테네의 명문가였다. 비극 작가와 정치가의 꿈을 꾸던 플라톤이 소크라테스의 제자가 되었던 때는 그의 나이 20세 무렵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 후에도 여전히 정치를 통해 현실을 개혁하고자 하는 야망을 갖고 있던 플라톤이 결정적으로 이 야망을 접게 된 계기는 28세 때 소크라테스가 사형을 당하면서였다. 이후 그리스 본토, 이탈리아, 시칠리아, 이집트 등을 다녀왔다는 기록이 있으며, 기원전 385년경 현실을 근본적으로 개혁할 길은 철학자를 기르는 것이라 믿고 아카데미아를 창설했다. 기원전 367년에 플라톤은 시칠리아 시라쿠사의 정치가 디온의 부탁을 받고, 새로이 권좌에 오른 나이 어린 시라쿠사의 통치자 디오니소스 2세를 철학자로 교육하여 철인 정치를 실현하고자 기원전 367년과 361년 두 차례에 걸쳐 시칠리아를 방문했다. 실패로 돌아간 이 시도를 제외하고, 플라톤은 아카데미아에서 저술하고 제자를 양성하는 데 자신의 평생을 바쳤다.
플라톤의 철학적 출발점은 소크라테스였다. 소크라테스는 인간의 삶을 도덕적 탁월성의 삶으로 고양할 방법을 이성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한 대화를 통하여 모색했다. 플라톤은 그의 사상을 이어받아 자신의 거의 모든 책을 소크라테스를 중심으로 한 대화의 형태로 저술하였다. 편의상 초기로 분류되는 그의 대화편들은 스승 소크라테스의 생각을 비교적 충실히 옮기면서 지혜, 용기, 절제, 정의, 아름다움, 경건 등 인간적 탁월성의 영역을 근본적으로 탐구하였다. 그는 지혜를 중심으로 삼아 이들 탁월성을 통일적으로 이해하고자 했다. 중기로 분류되는 대화편들에 와서 비로소 등장하는 형상 이론은 이런 초기의 생각에 형이상학적 기초를 놓는 이론이었다. 가령 용기 있게 행동하려면 용기가 무엇인지 알아야 하는데, 용기의 형상이란 바로 용기 있는 행동을 용기 있게 하는 용기 자체를 뜻한다. 용기의 형상을 아는 지혜가 바로 탁월성의 중심이 된다는 말이다. 개인적 탁월성의 영역을 『국가』 등의 대화편을 통해 정치적 영역으로 확장한 것 또한 중기 사상의 특징이다. 마지막으로 후기로 분류되는 대화편들에서 플라톤은 형상의 단일성과 고립성을 중시한 중기의 형상 이론을 형상간의 결합 문제로 심화시키는 한편, 자연에 대한 형이상학적 탐구와 삶의 문제를 통일적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을 거듭하였다. 이러한 노력은 중기의 『국가』에서 제시한 이상적인 정치 체제를 『법률』에서 새롭게 재탄생시킴으로써 그 결실을 맺었다.
플라톤에게 소크라테스는 자신을 철학으로 인도한 스승이자, 평생 풀어야 할 철학적 문제였다. 소크라테스가 아테네와 갈등했던 지점들은 플라톤에게 당대의 현실을 이해하는 통로였고, 그가 다른 사람들과 나눴던 대화들은 윤리와 철학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열쇠가 되었으며, 소크라테스라는 인물 자체는 ‘지혜를 사랑하는 철학자’라는 이상적인 인간형의 발견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플라톤의 생각을 이해하기 위해서 그의 초기 대화편들을 먼저 읽어 보는 것이 옳다. 플라톤이 20대에서 40대 초반에 걸쳐 썼던 것으로 추정되는 초기 대화편들에는 소크라테스의 사상과 행적에 대한 플라톤의 해석이 잘 담겨 있다. 이 초기 대화편들을 보면서 우리는 어떤 식으로 플라톤의 해석이 개입했는지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한다. 소크라테스의 원래 생각과 플라톤의 해석을 가르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기란 어려우므로, 작품 속의 소크라테스의 말과 그것을 그려 내는 작가인 플라톤의 시선을 같이 의식하며 책을 읽는 것이 중요하다. 마치 소설 속 주인공의 행위에 공감하며 소설을 보면서도 그 작가를 의식하듯이 말이다. 대화의 맥락을 잘 따라가는 것 또한 중요하다. 대화란 상대방의 반응에 따라 그 방향이 수시로 바뀔 수 있다. 대화의 형식을 택한 플라톤은 바로 이러한 특징에 유의하여 글을 썼기 때문에, 소크라테스의 질문에 왜 대화자가 긍정하거나 부정하는지, 왜 이런저런 대답을 하는지 생각하면서 읽는 태도가 필요하다. 플라톤의 대화편들 중에서도 특히 초기로 분류되는 대화편은 특정한 질문에 대답을 주기보다는 더 깊고 넓은 질문으로 이끌어 가기 위해 구상되었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의 변론』이 좋은 예가 될 수 있다. 『소크라테스의 변론』은 ‘나라가 믿는 신을 믿지 않고, 새로운 신적 존재를 도입하여 젊은이들을 타락시켰다’라는 죄목으로 고발당하여 법정에 선 소크라테스가 자신에 대해 변론을 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그중 ‘새로운 신적 존재를 도입’했다는 죄목과 관련하여 플라톤의 해석이 끼어든다. 소크라테스는 이것이 죄목이 된 이유에 대해, 어릴 적부터 자신에게 영적인 소리가 간간이 나타나 어떤 일을 하지 말라고 지시하곤 했는데 이를 빌미로 고발인들이 이런 죄목을 붙였다고 말한다. 그런데 소크라테스의 또 다른 제자인 크세노폰은 그의 저서 『소크라테스 회상』에서 이 영적인 소리에 대해 다른 이야기를 전한다. 이 목소리는 어떤 일을 하지 말 라고만 한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어떤 일을 하게 하거나 심지어 소크라테스가 아닌 다른 사람들의 일에 대해서도 조언했다는 이야기다. 왜 플라톤은 이 영적인 소리를 소극적인 영역에만 국한시켰을까? 이는 실제 사실 여부의 문제가 아니라 문제를 보는 해석의 관점이다. 이런 관점을 찾아 가며 읽을 때 플라톤의 대화편은 정해진 길을 가는 닫힌 여정이 아니라 갈 때마다 다른 풍경이 보이는 여행이 된다. 플라톤이 이야기하지 않는 것을 찾아 읽는 것도 중요하다. 『라케스』는 용기를 주제로 하는 대화편인데, 이 대화편의 주요 인물인 라케스와 니키아스는 실제 아테네의 장군으로, 이 두 사람이 용기에 대해 갖는 대립된 입장은 실제 이들의 행적을 반영한다. 이 대화편은 “우리는 용기가 무엇인지 찾아내지 못했다”는 결말로 끝나는 듯 보인다. 하지만 라케스와 니키아스가 서로 대립하고, 소크라테스가 이를 중재하며 새로운 문제를 제기하는 과정을 통해 ‘용기’는 그저 막연하고 알쏭달쏭한 수준에서 철학적 문제로 심화되고 확장된다. 답이 막힌 그 지점이 바로 철학적 문제가 시작되는 곳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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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플라톤의 중기 대화편부터는 실제 소크라테스의 사상보다 플라톤 고유의 사상이 나타난다고 한다. 플라톤의 사상 중 가장 잘 알려진 것은 바로 형상 이론이다. 그러나 뜻밖에도 플라톤의 대화편 가운데 형상 이론을 자세하게 다루는 것은 그리 많지 않다. 중기 대화편으로 꼽히는 『파이돈』, 『향연』, 『국가』에서도 형상에 대한 논의는 기대처럼 많지도 않고 구체적이지도 않다. ‘형상들의 형상’이라고 하는 ‘좋음’의 형상에 대해 언급하는 『국가』가 바로 그런 경우다. 『국가』의 6권과 10권에서 비교적 자세하게 형상 이론이 언급되지만 ‘좋음’의 형상에 대한 이야기는 다분히 비유적으로만 설명된다. 게다가 이 대화편의 가장 중요한 주제인 ‘정의(‘올바름’이라고도 번역된다)’의 형상에 대한 규정은 내내 막연한 상태에 머문다. 물론 정의의 형상에 대한 규정은 ‘제 할 일을 함’으로 기록된다. 그러나 이 말만 가지고 정의의 의미를 실감하기란 어렵다. 정의에 대한 이 규정이 갖는 실질적인 의미는 우리가 이 대화편 전체를 깊이 있게 읽어 가면서 깨달을 수 있다. 이렇듯 각 형상에 대한 규정을 대화편에서 논의하는 질문에 대한 실질적인 정답으로 보려는 생각은 대개 수포로 돌아간다. 그래서 철학사에 나오는 플라톤의 형상 이론에 대한 상식을 고집하면 할수록 플라톤의 대화편은 오리무중에 빠지기 마련이다. 플라톤의 대화편들은 그런 이해의 편의를 돕기 위한 상식을 넘어서서 항상 전체의 문맥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플라톤의 대화편 가운데 신비적인 측면이 도드라지는 『파이드로스』를 읽을 때도 이 점은 여전히 중요하다. 이 대화편에서 플라톤은 에로스(사랑)의 본성에 대한 탐구와 연설술(수사학)에 대한 탐구를 연결한다. 그러면서 그는 우리가 갖는 에로스의 본능은 우리가 순수한 영혼의 세계에 머물 때 보았던 아름다움의 형상에 대한 기억에서 비롯된다고 설명한다. 아마도 이 때문에 철학사적으로 형상 이론은, 형상이 우리가 사는 이 세계를 초월한 별도의 세계에 존재한다는 이른바 ‘두 세계 이론’으로 이해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해는 플라톤의 글을 글자 그대로만 해석하려는 단순한 독서에 기인하며, 글에서 이론만을 찾아 읽으려는 이론 강박증의 소산이다. “형상들이 영혼의 세계 속에 있다”는 말은 형상이 개별적인 사물들이 존재하는 방식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존재한다는 설명을 하기 위한 비유였을 뿐이다. 플라톤의 모든 대화편은 단순히 자신의 이론을 전달하고 주장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대화편을 읽는 독자들을 대화편 안으로 끌어들여 교육하고자 하는 목적을 갖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대화편에는 논증적인 이야기(로고스)뿐만 아니라 비유와 상징의 이야기(뮈토스)도 같이 등장한다. 이런 두 가지 이야기의 혼재 때문에 그의 대화편에 대한 이해는 자주 모호함과 혼란의 난관에 부딪치곤 한다. 그러나 이렇게 된 이유는 플라톤이 책을 통하여 단순히 이론을 전달하려고 하지 않고 독자의 삶을 치유하고 상승시키려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론의 사다리를 고집하는 대신 플라톤이 대화의 형태를 통해 진정으로 전달하고자 하는 것을 찾아 읽고 참여하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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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 후기의 대화편들을 읽는 일은 만만치 않다. 이론은 현저히 추상화되고, 논의는 길고 복잡하며, 문학적 향기는 옅어지고, 문장은 이전에 비해 건조하고 거칠다. 하지만 그가 펼쳐 내는 철학적 논의는 더욱 깊어져 아직도 우리는 그 유산을 다 소화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더욱 그의 후기 대화편들을 대할 때, 우리는 그 이전 대화편들에서 제기된 문제들의 연장선에서 읽을 필요가 있다. 플라톤의 자연 철학이 담긴 『티마이오스』도 그렇다. 이 대화편 속의 대화는 마치 『국가』에 나오는 대화를 했던 다음 날 이루어지는 것처럼 되어 있다. 전날 이상적인 나라와 그 시민들에 대해 이야기했던 소크라테스가 이제는 그런 시민들과 나라가 실제로 있었는지를 알고 싶다고 하자, 동석했던 사람들 중 크리티아스가 우리에게 잘 알려진 아틀란티스 이야기를 꺼낸다. 아득한 고대에 있었던 아틀란티스가 지중해 전역을 점령하려 할 때 이에 맞서 싸워 물리쳤던 고대 아테네야말로 바로 소크라테스가 이야기했던 그 이상적인 나라와 시민이라는 이야기다. 그러나 그 구체적인 내용을 전하기에 앞서 크리티아스는 이러한 이상적인 나라와 시민이 가능할 수 있는 조건, 즉 우주와 인류의 탄생부터 먼저 짚어 볼 것을 제안한다. 이렇게 플라톤은 자신이 그 전까지 강조해 왔던 실천적인 삶의 가능 근거를 우주와 만물의 탄생 과정에 대한 이해, 즉 자연 철학으로부터 끌어오고자 한다. 그래서 우리는 『티마이오스』라는 자연 철학적 저술을 단순히 플라톤이 자연에 대한 올바른 설명을 하는지만 따져 가며 읽기보다는, 참된 삶이라는 더 큰 문제를 다루기 위한 기획으로 이해하려는 시각에서 읽어야 한다. 문제의 연속성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플라톤의 마지막 대화편으로 추정되는 『법률』이 생생한 증거가 될 것이다. 『국가』에서 정치적이고 윤리적인 삶의 표본을 제시했던 플라톤은 『정치가』와 같은 후기 작품에서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이론적으로 고찰하는 과정을 거쳐 『법률』에서는 『국가』와는 다른 형태의 정치 체제를 제안한다. 이 정치 체제는 자연과 인간 본성에 대한 이해, 즉 우주의 탄생과 인간의 본질이 동일한 이성의 발현이라는 통찰이 기초가 되어 구성된다. 자연 세계와 인간에게 발현된 이성(또는 지성)이 법률을 통해 인간이 만든 공동체에도 배분될 때, 이성적인 정치 체제가 가능하다고 플라톤은 생각한다. 그리고 법률에 의한 이성의 배분은 우주와 인간의 본성에 대한 이해에 토대를 둔 법률을 제정하여 강제하는 것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고, 법률을 통해 시민들의 이성을 일깨워 자발적인 참여를 이끌어 냄으로써 완성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유럽의 철학은 플라톤 철학의 각주로 이해할 수 있다”는 유명한 말 은 플라톤의 철학이 시대마다 새로운 각주에 의해서 새롭게 읽혀야 한다는 뜻이 될 것이다. 플라톤의 철학은 고대의 유물로 갇혀서도 안 되고 갇힐 수도 없다. 왜냐하면 플라톤의 철학적 이론이 철학사의 한 부분으로 고정될 수 있어도, 그의 대화편에 나타나는 근본적인 사유의 힘과 상상력은 여전히 우리의 고정 관념을 흔들고 새로운 탐구의 길로 나서도록 부추기기 때문이다. 우리가 플라톤을 그의 대화편들을 통해 한 자 한 자 새로 읽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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